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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가을 밤의 단상

마른풀 냄새가 난다. 풀 냄새는 머지않아 무서리가 찾아온다는 숲에서 보내는 아픈 시그널이다.   늦은 밤 책상 앞에 동그랗게 웅크리고 앉아 있는 등 뒤에서 갑자기 귀뚜라미 우는 소리. 이맘때가 되면 매년 찾아와 발등을 툭 건들고는 폴짝 뛰어 마룻바닥에 배를 까뒤집고 곤두박질치던 놈. 나는 의자에서 돌아 앉아 두리번거린다.   적막 속에 갇혀있는 나를 찾아온 먼 그리움. 적요의 시공(時空)이 잠시 출렁인다. 놈을 보면 아련한 소리가 먼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들린다.   장독대 뒤에 숨어 다투어 울던 귀뚜라미 소리는 내 유년에 껴안고 자던 자장가였다.   교복에 단정을 차리던 무렵 감이 익어가는 뒤뜰에서 들리던 귀뚜리 울음소리. 그런 날은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를 펼쳐 놓고 책 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백로 지나고 추분이 가까워오자 귀뚜라미 우는 소리도 멎었다. 찻길에서 들리는 모터사이클 소리가 다듬질 소리 같이 들린다. 다듬질 소리는 이제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전설 속의 소리로만 남아 있다.   청년이 된 어느 날의 입동 근처. 저녁에 뜰로 나서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다듬이질 소리. 뜰에는 몇 남지 않은 은행잎이 가지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또, 닥. 또, 닥. 또닥또닥또닥또닥. 먼 곳으로부터 아득하게 들리던 소리. 어느 정숙한 여인이 한복 저고리 단정히 차려입고 다듬돌 앞에 앉은 고운 모습을 나는 상상했다. 다듬질 소리는 장단에 가락을 얹어 운율적으로 들려 소리가 그친 후에도 긴 여음을 남겼다. 그 소리는 잊을만하면 들렸다. 늦은 밤에 들리던 다듬이질 소리는 큰길 건너 애자네 엄마가 만들어 내는 소리였음을 뒤늦게 알았다. 새 봄에 대학에 들어갈 애자는 그때로부터 다섯 해 전에 아버지를 월남 전선에서 여의었다. 앞길이 창창한 장교였던 그의 죽음에 이웃들은 한 겨울보다 더 시린 여름을 보냈다.   낭만적으로만 느꼈던 그때 다듬이질 소리의 의미를 50년이 다 된 지금에서야 알 것도 같다. 다듬이질 소리는 육자배기 타령이었고, 아니리로 풀어내는 한탄조의 중모리와 한의 절정을 휘모리장단으로 토해내는 청상이 된 한 미망인의 하소연이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고즈넉이 눈을 감고 졸지에 청상이 된 한 여인의 애끓듯 풀어내는 다듬이질 가락 한 토막을 베고 밤을 뒤척였을지도 모른다.   단풍을 보면 여리거나 짙은 얘기가 채색되어 있어 사연이 많은 잎일수록 곱다. 인생의 가을을 맞은 사람의 얼굴에도 아팠거나 슬펐던 한때의 모습이 수채화로 그려져 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서정주 시인의 시처럼 생의 가을을 맞은 당신도 그래서 더 아름답다. 조성환 / 시인

202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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